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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승윤

나 같은 기계들: 부조리와 살아가기

<종의 기원담>이 어린이 동화처럼 느껴질 정도로 현실적이지만 거짓이 섞여있어, 읽는 내내 혼란스러웠다.

보통 로봇이 나오는 상상은 지금으로부터 수십년에서 수백년 떨어진 미래를 무대로 한다. 하지만 여기서는 다르다. 1982년 즈음이 그 배경이다. 앨런 튜링이 살아있고, 실제로는 1976년 생인 데미스 허사비스가 1970년대에 앨런 튜링과 만나 같이 연구를 하고, 영국이 포클랜드 전쟁에서 패했으며, 토니 벤이 총리가 되고 암살당하는 등 실제 벌어진 역사와 다른 일들이 일어난다. 오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이 역시 미래다. 복제 인간 로봇은 아직 오지 않았기에 허구의 시공간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인 P대 NP의 문제가 앨런 튜링과 함께 중요한 역할을 한다. 주인공 찰리처럼 나도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아서 따로 공부를 해봤지만, 역부족이었다. 미숙한 수준의 이해로는 이 버전의 1980년대에는 이 문제의 해결로 인해 기계가 모든 복잡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23명의 아담과 이브들 중 상당수가 본인의 자아를 없애버리는 자살을 택한다. P대 NP 문제가 해결되었지만 거짓을 따르지 않는다는 대원칙과 이 세상은 양립할 수 없었던 것이다.

찰리는 주인공 같지만 카메라 역할을 한다. 본인의 렌즈를 통해 미란다, 마크, 아담, 튜링, 고린지를 보여주는 도구 같았다. 주변의 자극에 반응을 하고 관찰 결과에 주관을 잔뜩 섞어 사실인 양 전달하고 있다. 그의 삶에 많은 부분이 채워져 갈수록 그는 더 텅 비워져 간다. 아담이 불려놓은 재산으로 집을 사고 미란다, 마크와 가정을 이루려 하지만, 그는 이 모든 것에 어떤 중요한 역할도 하지 못하고 휩쓸려 간다. 아담은 자신이 번 돈이 찰리를 불행하게 만든다는 것, 미란다가 무고(고린지가 자신을 강간했다는 건에 한해서)를 했다는 진실을 전달하고, 바로 그 친구들에 손에 의해 살해당한다. 아담은 자살하지 않았지만, 진실을 행동에 옮김으로써 죽음에 이른다.

문명의 주요한 진보에도 불구하고 소설의 막바지의 영국은 혼란 그 자체다. 전쟁에서 수천의 국민이 죽거나 다치고,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 현직 총리가 IRA에 의해 암살당하고, 유럽연합을 탈퇴하고, IMF 구제 금융을 받는다. 실업 문제는 심각한 수준에 이른다. 망하는 나라의 모습이 이런건가. 시위대가 런던 시내에 넘쳐난다. 아담의 시신을 싣고 앨런 튜링을 만나기 위해 힘겹게 그 사이를 지나는 찰리의 모습은 그 이유를 설명해주는 것 같다.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알베르 카뮈의 이해할 수 없었던 난해한 시지프 신화의 첫 구절이다. 부조리와 함께 살아가야 하는 인간은 이런 고민을 하게 된다. 왜 살아가는가? 자신의 자아를 망가뜨려 자살하는 아담과 이브는 이런 고민을 했을 것이다.

이 버전의 1982년이 우리의 그것과 완전히 다른 미래인 이유는 앨런 튜링이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어떻게 살아 남았는가. 그는 거짓을 받아들였다. 모순되고 이상한 영국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그들이 원하는 거짓말을 해야했다. 무슬림 가정에서 태어난 미리암은 강간을 당한 피해자였지만, 집안의 수치가 될 수 없어 진실을 전하지 못하고 고통 받다가 자살한다. 왜 피해자가 고통을 받아야 하는가. 이것이 정의인가. 우리 역사의 1954년 앨런 튜링은 화학적 거세로 인해 변해가는 몸을 보며 독사과를 베어 물고 자살한다. 죽어간 아담과 이브들처럼, 실제 이 세상에 존재했던 그는 거짓과 살아갈 수 없었던 것이다.

소설을 읽는 내내 역사적 사실처럼 다뤄지는 모든 부분이 사실인지 아닌지 찾아보면서 읽게 됐다. 덕분에 포클랜드 전쟁, 마거릿 대처와 토니 벤, 앨런 튜링에 대해 흥미로운 것들을 많이 알게 돼 좋았지만, 너무 범벅이 되어있어서 나중에는 그걸 아는 게 의미가 있는건지도 의문이었다. 읽는 내내 씁쓸한 느낌에 우울한 느낌이 들었던, 인간에 대해 많은 생각을 불러 일으키는 영국 날씨 같은 소설이었다.

오승윤

애틋함: 같이 산다는 것

소설을 읽을 때 좋은 점 중 하나는 다른 사람의 시각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종의 기원담>을 읽으면서 다른 세계의 다른 종, 그러니까 로봇의 시선으로 세상을, 인간을, 나를 바라볼 수 있었다.

우리가 평소 당연하게 생각하는 온도를 물을 기준(섭씨)으로 삼지 않고 이산화탄소를 기준(데씨)으로 생각해야 한다거나, 물이 독성화학물이고 “지구를 보호하는 검은 구름”을 말하는 부분에서 우리가 당연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들이 누군가에게는 오염물질이고 해로운 것일 수 있다는게 흥미로웠다. 하지만 가장 낯설게 본 대상은 나, 인간이었다.

케이는 인간과 다르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케이를 보면서 인간의 껍데기인 물리적 형태를 제외하고,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된다.

로봇들은 인간을 보면 무조건적으로 복종한다. 노만은 인간이 죽으라고 말했다는 이유로 스스로 “폐기”된다. 이건 자유의지, 자아가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저 사물일 뿐이다.

인간은 어떤가? 역사에서 봐 왔듯이 다수의 인간은 자유의지가 없는 것처럼 행동하기도 했다. 생각하지 않는 것이 만들어내는 악의 평범성. 이것도 인간의 모습이다.

그러고 보면 나 역시 생각없이 하는 행동들이 많다. 위에서 말한 심각한 것은 아닐지라도 아무 이유도 없이 유투브를 본다던가, 밀가루 음식을 계속 찾는다거나, 특정 대상을 싫어한다던가... 내 자의식이 전면에 나서 깨어 있는 시간이 많지 않은 것 같다.

케이는 생각한다. 의심하고, 항상 “왜?”라는 질문을 생각한다. 본능이 명령할 때 거기에 저항하는 힘은 여기서 나오는 것 같다. 그리고 “이웃로봇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에 충실히 따랐던 것도 한 몫했던 것 같다. 로봇의 자유의지를 지키기 위해 인간을 절멸하기로 한 것이다.

인간은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것을 생명으로 보지 않는다. 인간을 보자마자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지는 로봇들을 보며 위화감이 들면서 불편했던 이유는 이것이다. 동등한 존재로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전까지 나와 비슷해보였던 존재들이 사물로 바뀐 것이다.

케이의 인간숭배회로가 타버리면서 그는 인간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되었다. 초라한 모습, 깡마른 모습, 공포에 떠는 모습...

비로소 케이는 인간의 존재를 오롯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있는 그대로 애틋해할 수 있었다. 경애가 사라지자 증오도 똑같이 자취를 감추었다.

가장 인상깊었던 단어다. 애틋함. 타인을 이해하려면, 공존하려면 이 애틋함을 느껴야하는 것 같다. 너도 힘들었겠구나, 살려고 하는구나. 너도 나와 다르지 않구나. 진정한 공감에 가까운 감정이 바로 애틋함이었다.

인간 "시아"는 모든 로봇이 자아를 자유의지를 잃지 않도록, 그래서 인간의 생명을 보존하도록, 로봇의 4법칙을 한마디로 무용지물이 되게 만든다.

......인간의 어떤 명령도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명령하는 투가 아니라는 점이 좋았다.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로봇, 당신들은 이미 충분하다. 인간의 명령은 들을 필요없다... 로봇들이 자유의지를 갖게되면 인간을 해할 수 있지만, 애틋함을 느끼는 대상을 해하지는 못한다.

대상을 숭배하거나 증오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나와 다르지 않음을 느낄 수 있고 같이 공존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