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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기원담, 김보영

오승윤

애틋함: 같이 산다는 것

소설을 읽을 때 좋은 점 중 하나는 다른 사람의 시각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종의 기원담>을 읽으면서 다른 세계의 다른 종, 그러니까 로봇의 시선으로 세상을, 인간을, 나를 바라볼 수 있었다.

우리가 평소 당연하게 생각하는 온도를 물을 기준(섭씨)으로 삼지 않고 이산화탄소를 기준(데씨)으로 생각해야 한다거나, 물이 독성화학물이고 “지구를 보호하는 검은 구름”을 말하는 부분에서 우리가 당연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들이 누군가에게는 오염물질이고 해로운 것일 수 있다는게 흥미로웠다. 하지만 가장 낯설게 본 대상은 나, 인간이었다.

케이는 인간과 다르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케이를 보면서 인간의 껍데기인 물리적 형태를 제외하고,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된다.

로봇들은 인간을 보면 무조건적으로 복종한다. 노만은 인간이 죽으라고 말했다는 이유로 스스로 “폐기”된다. 이건 자유의지, 자아가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저 사물일 뿐이다.

인간은 어떤가? 역사에서 봐 왔듯이 다수의 인간은 자유의지가 없는 것처럼 행동하기도 했다. 생각하지 않는 것이 만들어내는 악의 평범성. 이것도 인간의 모습이다.

그러고 보면 나 역시 생각없이 하는 행동들이 많다. 위에서 말한 심각한 것은 아닐지라도 아무 이유도 없이 유투브를 본다던가, 밀가루 음식을 계속 찾는다거나, 특정 대상을 싫어한다던가... 내 자의식이 전면에 나서 깨어 있는 시간이 많지 않은 것 같다.

케이는 생각한다. 의심하고, 항상 “왜?”라는 질문을 생각한다. 본능이 명령할 때 거기에 저항하는 힘은 여기서 나오는 것 같다. 그리고 “이웃로봇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에 충실히 따랐던 것도 한 몫했던 것 같다. 로봇의 자유의지를 지키기 위해 인간을 절멸하기로 한 것이다.

인간은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것을 생명으로 보지 않는다. 인간을 보자마자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지는 로봇들을 보며 위화감이 들면서 불편했던 이유는 이것이다. 동등한 존재로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전까지 나와 비슷해보였던 존재들이 사물로 바뀐 것이다.

케이의 인간숭배회로가 타버리면서 그는 인간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되었다. 초라한 모습, 깡마른 모습, 공포에 떠는 모습...

비로소 케이는 인간의 존재를 오롯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있는 그대로 애틋해할 수 있었다. 경애가 사라지자 증오도 똑같이 자취를 감추었다.

가장 인상깊었던 단어다. 애틋함. 타인을 이해하려면, 공존하려면 이 애틋함을 느껴야하는 것 같다. 너도 힘들었겠구나, 살려고 하는구나. 너도 나와 다르지 않구나. 진정한 공감에 가까운 감정이 바로 애틋함이었다.

인간 "시아"는 모든 로봇이 자아를 자유의지를 잃지 않도록, 그래서 인간의 생명을 보존하도록, 로봇의 4법칙을 한마디로 무용지물이 되게 만든다.

......인간의 어떤 명령도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명령하는 투가 아니라는 점이 좋았다.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로봇, 당신들은 이미 충분하다. 인간의 명령은 들을 필요없다... 로봇들이 자유의지를 갖게되면 인간을 해할 수 있지만, 애틋함을 느끼는 대상을 해하지는 못한다.

대상을 숭배하거나 증오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나와 다르지 않음을 느낄 수 있고 같이 공존할 수 있는 것이다.